
산업화 이후 인류는 수차례의 경제적 전환기를 경험해 왔다. 농업사회에서 산업사회로, 그리고 정보화 사회를 거쳐 지금 우리는 또 다른 전환점에 서 있다. 이 전환은 단순한 경기 순환이나 기술 변화의 문제가 아니다. 국가의 역할, 시장의 작동 방식, 기술이 만들어내는 권력 구조까지 근본적으로 재편되는 ‘질서의 전환’에 가깝다. 팬데믹, 기후위기, 지정학적 갈등, 디지털 전환이 동시에 발생하는 지금의 상황은 기존 경제 이론만으로는 설명하기 어렵다. 전환 이후의 경제 질서는 더 이상 효율성만을 중심으로 작동하지 않는다. 이제 경제는 회복탄력성, 안정성, 지속가능성을 핵심 가치로 삼는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었다.
과거 신자유주의 체제에서 국가는 시장의 실패를 최소한으로 보완하는 조정자 역할에 머물렀다. 규제 완화와 민영화, 자유무역 확대가 성장의 정답처럼 여겨졌고, 국가는 개입을 최소화할수록 효율적인 존재로 평가받았다. 그러나 글로벌 금융위기와 코로나19를 거치며 이러한 인식은 급격히 흔들렸다. 위기 상황에서 시장은 스스로를 구하지 못했고, 결국 최후의 안전망은 국가였다. 대규모 재정지출, 통화 완화, 산업 직접 지원이 없었다면 경제 시스템 자체가 붕괴했을 가능성이 높다. 이 경험은 국가의 역할을 ‘보조자’에서 ‘시스템 설계자’로 재정의하게 만들었다.
이제 국가는 단순한 규칙의 수호자가 아니라, 산업 구조를 설계하고 기술 방향을 선택하며 위험을 분산시키는 전략적 행위자가 되었다. 반도체, 배터리, AI, 에너지 산업에 대한 각국의 적극적 개입은 이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이는 과거 개발국가 모델의 단순한 복귀가 아니라, 불확실성이 상시화된 시대에 대응하는 새로운 형태의 국가 자본주의라 할 수 있다. 특히 공급망 재편은 국가 간 경쟁의 핵심 축이 되었고, 경제는 다시 정치와 밀접하게 결합되기 시작했다.
시장 역시 변화하고 있다. 전통적 시장은 가격 메커니즘을 통해 효율적 자원 배분을 달성한다고 여겨졌지만, 플랫폼 경제와 데이터 경제의 확산은 이 전제를 흔들었다. 거대 플랫폼 기업은 네트워크 효과를 통해 독점적 지위를 확보하고, 시장 참여자들의 선택을 구조적으로 제한한다. 이는 자유경쟁이 아닌 ‘설계된 시장’에 가깝다. 알고리즘이 소비자의 선택을 예측하고 유도하는 상황에서, 시장은 더 이상 중립적인 공간이 아니다. 정보 비대칭은 줄어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새로운 형태로 심화되었다.
기술은 이 전환의 중심에 있다. 인공지능, 자동화, 데이터 기술은 생산성을 극적으로 높이는 동시에 노동의 구조를 근본적으로 바꾸고 있다. 문제는 이 기술 발전의 혜택이 균등하게 분배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고숙련 노동과 자본은 막대한 수익을 얻는 반면, 중간 계층과 저숙련 노동자는 구조적으로 배제되는 경향이 강해진다. 이는 단순한 소득 격차를 넘어 사회적 이동성 자체를 제한하는 방향으로 작용한다. 기술 발전이 곧 사회적 진보라는 믿음은 더 이상 성립하지 않는다.
이러한 변화 속에서 ‘전환 이후의 경제 질서’는 몇 가지 특징을 갖는다. 첫째, 성장 중심에서 안정 중심으로의 이동이다. 고속 성장은 환경 파괴와 불평등을 심화시켰고, 이제 지속가능성이 성장보다 중요한 가치로 부상했다. 둘째, 효율성보다 회복탄력성이 중시된다. 공급망 다변화, 전략 산업 보호, 공공 인프라 강화는 단기적으로 비효율처럼 보이지만 위기 대응 능력을 높인다. 셋째, 국가·시장·기술의 경계가 흐려진다. 공공과 민간, 규제와 혁신은 대립 관계가 아니라 상호 의존적 구조로 재편되고 있다.
이 새로운 질서에서 중요한 질문은 ‘누가 성장을 주도하는가’가 아니라 ‘누가 위험을 감당하는가’이다. 전통 경제학이 개인의 합리적 선택을 전제로 했다면, 전환기의 경제는 집단적 선택과 제도적 설계를 요구한다. 복지, 교육, 노동시장 정책은 더 이상 비용이 아니라 장기적 투자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이는 국가의 재정 역할을 재평가하게 만들고, 조세와 재분배에 대한 사회적 합의의 중요성을 부각시킨다.
결국 전환 이후의 경제 질서는 단일한 모델로 정의될 수 없다. 각 국가는 자신의 정치·사회적 조건에 맞는 방식으로 국가와 시장, 기술의 균형을 다시 설정하게 될 것이다. 중요한 것은 과거의 성장 공식에 집착하지 않는 것이다. 변화는 이미 시작되었고, 이를 인식하지 못한 사회일수록 더 큰 비용을 치르게 된다. 앞으로의 경제는 더 느리게 성장할 수는 있어도, 더 단단하고 회복력 있는 구조로 진화할 것이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국가, 시장, 기술은 더 이상 분리된 개념이 아닌 하나의 시스템으로 작동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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